LOVE

3년 차 기념일, 정답 말고 우리 답

챙기자니 숙제 같고, 넘기자니 마음 한쪽이 흐려지는 3년 차의 기념일 이야기.

EXNUL · 2026.10

“올해도 그냥 밥만 먹을까?”

지은이는 메뉴판을 덮으며 그렇게 물었다고 했다. 사귄 지 3년, 세 번째 기념일을 일주일 앞둔 저녁이었다. 남자친구는 “응, 좋아” 하고 바로 대답했고, 지은이는 그게 조금 서운했다.

“그래서 그다음엔?” 내가 물었다.

“아무 말도 안 했지. 내가 먼저 그러자고 했잖아.”

3년 차의 기념일은 늘 이런 식으로 온다. 챙기자니 숙제 같고, 넘기자니 마음 한쪽이 흐려진다. 정답은 없다. 둘이 고를 수 있는 길이 몇 갈래 있을 뿐이다.

DATE

우리는 어떤 날을 기억할까

세 번째 기념일을 일주일 앞둔 주말.
세 번째 기념일을 일주일 앞둔 주말.

수진이 커플은 사귄 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. 대신 처음 만난 날은 매번 헷갈린다. 남자친구는 9월이라 하고 수진이는 8월 말이라고 우긴다. 둘은 그 이야기로 해마다 한 번씩 투닥거리고, 해마다 같이 웃는다.

날짜는 맞히는 게 아니라 정하는 거구나 싶었다.

사귄 날 하나만 크게 챙기는 커플이 있고, 처음 만난 날까지 가볍게 두 번 챙기는 커플이 있다. 아예 날짜 대신 첫눈 오는 날처럼 계절을 기념일로 삼는 커플도 봤다. 어느 쪽이든 한 사람만 달력을 세고 있지 않으면 된다.

GIFT

선물은 상자 안에 없을 수도 있다

3년쯤 되면 선물 고르기가 갑자기 어려워진다. 갖고 싶은 건 이미 있고, 필요한 건 너무 생활 같다. 혜원이는 작년 기념일에 남자친구 운동화 끈을 새것으로 바꿔 줬다. 끝이 다 풀려 있던 끈이었다. 남자친구는 다음 날 아침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다가 알아채고, 한참을 웃었다고 했다.

작은 걸 알아봐 주는 게 선물이 되는 시기다.

물건이 좋다면 매일 쓰는 것 중 낡은 걸 새것으로. 경험이 좋다면 둘 다 처음 해 보는 하루짜리 수업이나 처음 가 보는 동네. 실패가 싫다면 평소에 서로 갖고 싶은 걸 메모로 나눠 두는 방법도 있다. 서프라이즈가 꼭 필요한지도 한 번쯤 물어볼 만하다. 같이 고르는 시간이 더 설레는 커플도 많다.

LETTER

편지는 다섯 줄이면 된다

편지를 쓰는 밤.
편지를 쓰는 밤.

편지 얘기를 꺼내면 다들 손사래부터 친다. 쓸 말이 없다고. 그런데 3년이면 쓸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거다. 어디서부터 꺼낼지 모를 뿐.

그래서 나는 딱 세 개만 고르라고 한다. 올해 가장 또렷한 하루 하나. 그날 고마웠던 일 하나. 내년에 같이 하고 싶은 일 하나.

“항상 고마워”는 흐린 날 같다. “내가 아팠던 날 편의점 죽 사 들고 와 줘서 고마웠어”는 갠 날 같다.

다섯 줄이면 된다. 대신 날짜와 장소가 들어간 다섯 줄.

BUDGET

돈 얘기는 비 오기 전에

제일 꺼내기 힘든 말이다. 그런데 3년쯤 지나면 둘의 사정은 처음과 달라져 있다. 한 사람은 회사를 옮겼고, 한 사람은 적금을 막 시작했을지도 모른다.

기념일 비용을 반반 나누는 커플, 해마다 번갈아 준비하는 커플, 매달 조금씩 같이 모아 두는 커플. 다 괜찮다. 얼마를 쓰느냐보다 둘 다 편한 선이 어디쯤인지가 먼저다. 숫자를 말하기 어렵다면 “이 정도면 나는 부담 없어” 하는 선을 각자 먼저 꺼내면 된다.

우산은 비 오기 전에 챙기는 게 쉽다. 돈 얘기도 그렇다.

지은이는 결국 기념일 전날 다시 물었다고 했다.

“우리, 이번엔 밥 말고 바다 갈래?”

남자친구는 잠깐 생각하더니 메뉴판 대신 휴대폰 지도를 열었다.

글 EXNUL 편집부

BEFORE THE DAY

일주일 전, 둘이 한 번씩 물어볼 것

날짜
우리가 챙기는 날, 둘 다 같은 날로 알고 있는지.
서프라이즈
깜짝 선물이 좋은지, 같이 고르는 쪽이 좋은지.
비용
“이 정도면 부담 없어” 하는 선이 어디쯤인지.

기사 속 사진은 AI로 만든 가상 인물이고, 글 속 등장인물도 가상 인물이에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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